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버링겐 상공 공중충돌 사고 (문단 편집) == 여담 == 바시키르 2937편에는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하여 69명이 탔으며[* 승객 60명, 조종사 포함 승무원 9명] 탑승객 60명 중 4분의 3이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학생이었다. 이들은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지역 유지들의 자녀들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유네스코]] 위원회로 [[수학여행]]을 가던 길이었다. 본래 이들은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아에로플로트]] 비행기를 타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여행사 측의 실수로 [[도모데도보 국제공항|도모데도보 공항]]으로 잘못 데려다 주면서 원래 비행편을 놓쳤다.[* 참고로 세레메티예보는 모스크바의 북쪽 끝에, 도모데도보는 남쪽 끝에 있다. 차가 자주 막히는 모스크바 외곽 도로 상황을 감안한다면 택시로도 3시간은 걸린다.] 이틀 후에 겨우 여행사 측에서 대체 비행편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바시키르 2937편이었다. 아이들이 한순간에 이 사고로 사망하자 바시키르 사회에는 상당한 충격이 몰아쳤다. 사고 이후 독일의 위버링겐 숲 속, 충돌지점 아래 지상에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공원이 생겼다. 관제사 페테르 닐센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닐센은 스카이 가이드의 매니지먼트 잘못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닐센과 같이 일하고 있어야 했던 관제사는 밤이라고 옆방에서 쉬고 있었다. 물론 규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지만 스카이가이드 측은 이에 대한 제재를 취하지 않았다. 즉, 두 명이 해야 될 일을 닐센 혼자서 워크스테이션 두 개를 돌아다니면서 처리해야 했던 것이다. 충돌 사고가 일어나기 몇 분 전에는 다른 항공기가 착륙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전화 시스템이 고장난 상황이어서 공항 측에 연락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해야 했다. 또한 다른 곳에서 충돌 경고를 알리는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상의 충돌 감지 경보마저도 레이더 점검으로 인해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충돌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DHL 611편에는 아무런 경고나 확인을 하지 않고 충돌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방치하는 등 관제사로서 명백한 실책을 저지른 것 또한 분명하다. 충돌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기에 1분은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닐센이 바시키르 기에 하강하라는 지시를 하고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면서 자리를 뜨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른 항공기를 관제하고 있다고 해도 충돌위험이 있는 항공기들을 이런 식으로 안이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었다. 페테르 닐센은 이 사고 후 다시는 관제사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꾸역꾸역 회사는 다녔다. 닐센은 관제업무가 아닌 다른 백 오피스 업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에 걸려 [[취리히]] 근교의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중 2004년 2월 이 사고 피해자의 유가족인 비탈리 칼로예프(Виталий Калоев)에게 [[사적제재|살해당했다.]][* 본업은 건축가며 나름 그 지역에서 명망 있던 건축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칼로예프는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야 공화국]] 사람인데 칼로예프의 부인과 두 자녀는 수학여행단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일하고 있었던 칼로예프를 만나기 위해 해당 비행기에 탑승하여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칼로예프는 수색대가 아직 딸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을 알고 직접 현장을 헤매다가 결국 자신이 딸아이의 시신을 스스로 안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우울증에 빠져 가족들의 묘지를 떠나지 못할 정도로 사실상 폐인이 되었다.[* 게다가 장례식에 참석한 ICAO 관계자들과 스카이 가이드 관계자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한 뒤 유가족들을 피해 도망가기만 바빴다.] 칼로예프의 진술에 의하면 수소문 끝에 찾아간 닐센의 집에서 신경질적인 응대를 당하고 거기다 사망한 자녀의 사진이 바닥에 던져진 것에 격분해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칼로예프는 자신이 행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사고 관련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 분개한) '''처벌'''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엄밀히 말해 이 시점에서는 공식적인 사고조사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법정의 재판 역시 결과가 나오기에는 이른 시점이었다.[* 이후 2010년에 와서야 스카이 가이드의 관련자들이 과실치사죄가 인정되어 벌금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페테르 닐센은 살해당할 당시 아내와 어린 세 자녀가 있었다. 이후 칼로예프는 2005년 스위스 법원에 의해 8년형을 선고받았다가 사건 당시 정신상태[* 가족을 잃고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를 참작하면 판결이 올바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4분의 1인 2년만 복역하고 [[가석방]]되었다. 칼로예프는 고향에서 암암리에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귀국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건설부 차관'''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칼로예프는 재혼하여 아들과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2018년에 칼로예프의 이야기를 담은 "Unforgiven (Непрошенный)"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한편 스카이 가이드 역시 비난의 대상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업무량 분산 등 관제 센터 규정이 변경되었다. 또 ICAO도 세계적으로 비난을 받다가 이 사건 이후로 TCAS와 관제사의 명령이 상반될 경우 조종사는 무조건 TCAS를 따르는 것으로 규정을 변경했다.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2에서 죽음의 교차점(Deadly Crossroads)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으며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소개되었고 한국에서는 2015년 5월 10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와 2016년 2월 21일자 [[EBS]] 세계의 눈에서 방송되었다. 비탈리 칼로예프의 위 이야기를 토대로 한 영화 《애프터매스》가 2017년 개봉했다. 페테르 닐센에 대응하는 역인 제이크 보네이노스를 스쿠트 맥네어리가, 비탈리 칼로예프에 대응하는 역인 로먼을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했다. 하지만 1천만 달러 수준 제작비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100만 달러조차 벌지 못하고 2차시장으로 밀려났다.[* 현실과 달리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가석방 되었다가 가족묘를 찾아갔다 피해자 아들이 복수하러 오자 이해 한다고 가족 곁으로 가려 했지만 만감이 교차한 아들이 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며 복수를 포기한다.] 또한 과실이 전혀 없었음에도 이 사고로 이미지가 나빠진 바쉬키르 항공은 결국 2007년 5월 파산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후 바쉬키르스텐 항공이 뒤를 잇다가 모기업인 VIM 항공이 파산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2007년 9월 스위스 법정은 관제 회사인 스카이 가이드 직원 4명 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 하였다. 먼저, 야간 근무 시 항상 2인 1조로 관제사 2명이 근무 해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 하고 관제사 1명만 단독 관제 하도록 사실상 묵인 했던 관리자 3명은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사고 당일 보수 작업을 감독 했던 프로젝트 감독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 사람은 스위스 화폐로 13500프랑 (한화 약 2천만원) 의 벌금형을 선고 받은 것으로 사건이 종결이 되었다.[* 이 사람은 매뉴얼을 무시한 관리자들과 하던 대로 했을 뿐이지만 그 결과 닐센이 가혹한 대가를 치뤄야 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책임을 묻긴 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